'저는 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하여 싸웠던 인디안들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백인들이 그들의 신성한 숲에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들을 잘랐습니다. 매일밤 인디안들이 나가서 백인들이 만든 그 길을 해체하면 그 다음 날 백인들이 와서 도로를 다시 짓곤 했습니다. 한동안 그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숲에서 가장 큰 나무가 백인들이 일할 동안 그들 머리 위로 떨어져 말과 마차들을 파괴하고 그들 중 몇몇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백인들은 떠났고 결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브루스 개그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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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25, 2009

[국문 번역] MASSACRE AT NO GUN-RI

Click to enlarge this depiction of the No Gun-ri massacre
노근리 학살을 묘사한 위를 클릭하시길.


Ninety-four year old Chung Eun Yong points out the bullet holes from US 7th Cavalry rifle fire
94세 정은용 옹이 미국 제 7 기병대의 소총 발화들로 생긴 총탄 구멍들을 가르키고 있다.
Bold

* Bruce Gagnon blog 브루스 개그논 블로그
Wednesday, October 14, 2009 2009년 10월 14일
MASSACRE AT NO GUN-RI 노근리의 학살


Yesterday I spent most of the day visiting the site of the US Army 7th Cavalry Regiment's massacre of more than 225 innocent Korean civilians on July 26, 1950 at No Gun-ri during the Korean War.


는 어제 대부분의 날들을 한국 전쟁 기간 1950년 7월 26일 미 육군 제 7 기병대 연대가 225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노근리 현장을 방문하며 보냈읍니다.

In the days before July 26, 1950 the North Korean army was pushing
US military forces southward. The US Army ordered two villages of peasant farmers in the No Gun-ri area to evacuate. There were taken by the US military to a nearby railroad track and ordered to walk along it. At one point the 500-600 refugees were instructed to bunch up and sit on the tracks. Two US military aircraft then circled overhead and dropped 7-8 bombs on their heads.

1950년 7월 26일 전 북한군은 미군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있었읍니다. 미군은 노근리 일대 농부들이 사는 두 마을에 떠날 것을 명령했읍니다. 그들은 미군에 의해 근처 철도 선로로 이동되었고 그 길을 따라 걷도록 명령 받았읍니다. 한 지점에서 500~600여명의 피난민들은 한 데 묶여져 선로에 앉을 것을 명령 받았읍니다. 그리고 나서 두 미군 비행기가 머리 위를 날았고 그들의 머리 위에 7~8개의 폭탄을 떨어 뜨렸읍니다.

This story was told to me yesterday by a 72 year-old woman, Yang Kae-suk, who was 13 years-old at the time of the attack. Her father was carrying her grandmother on his back. The body of her grandmother was never found as body parts flew in every direction.

이 이야기는 어제 공격 당시 13세 였던 72세 양[해]석 할머니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 분의 아버지는 그의 등에 그 분의 할머니를 엎고 있었읍니다. 그 분 할머니의 몸은 산산 조각으로 흩어져 결코 찾지 못했읍니다.

Her other family members tried to hide near a tree and her mother was severely wounded. A bomb fragment hit Yang in the back of the head and her left eye ball blew out of the socket and she tossed it on the ground.

그분의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근처 다리에 숨으려 했지만 그 분의 어머니는 심하게 상처를 입었읍니다. 폭탄 조각이 양할머니의 머리 뒤를 치자 왼쪽 눈동자가 동공에서 튀어나왔고 [양할머니는] [순간] 그것을 땅으로 던졌읍니다.

Soon 7th Cavalry soldiers began firing their rifles at the defenseless crowd and they hid for cover under a nearby train tunnel. For the next four days and three nights the people inside the tunnels were fired on from four different directions by the US soldiers who had them surrounded. US planes reappeared and strafed them with machine gun fire. More people, who were crammed inside the tunnels, were killed as they tried to sneak out for water or tried to escape. Some number did escape the madness that surrounded them.

곧 제 7기병대 군인들이 그들의 소총을 무방비 상태의 군중들을 향해 쏘기 시작했고 그들은 근처의 철도 터널 아래로 몸을 숨겼읍니다. 세 밤 네 낮 동안 그 터널의 사람들은 그들을 에워쌌던 미군들의 총을 사방 서로 다른 방향에서 맞았읍니다. 미군 비행기가 다시 나타나 그들에게 기계총으로 소총 사격을 했읍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터널 속에 꾹꾹 채워졌다가 물을 찾아 살짝 나오려 하거나 탈출하려 할 때 죽임을 당했읍니다. 몇몇은 그들을 에워쌌던 광기로부터 탈출했읍니다.

Finally in the dark of night the Army's 7th Cavalry withdrew as the North Korean Army advanced. Then early on the fourth morning the North Koreans told the people they were free.

제 7 기병대는 북한군이 진입하면서 마침내 밤의 어둠을 타 퇴각했읍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이른 아침 북한군이 그들에게 자유라 말했읍니다.

This was not the first time the 7th Cavalry had been associated with a mass slaughter of civilians. The Regiment perpetrated the Wounded Knee Massacre in South Dakota on December 29, 1890, at the end of the Indian Wars.

제 7 기병대가 시민 대량 학살에 연루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 기병대는 인디언 전쟁의 끝, 1980년 12월 29일 사우스 다코타 주 운디드 니(Wounded Knee) 학살을 범했읍니다.

Yang's mother was in terrible need of medical care but there was none available. Maggots had begun to appear inside her wounds. Her father made medicines from the rye seed and bandages from the persimmon tree that grows abundantly in the area. Her mother was to survive.

양할머니의 어머니는 의술 치료를 몹시 필요로 한 상태였으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구더기들이 그녀의 상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읍니다. 양할머니의 아버지는 보리 씨앗으로 약을 만들었고 그 지역에서 넘치게 자라는 감나무로부터 붕대를 만들었읍니다.

For many years the No Gun-ri massacre remained a US Army secret as the successive right-wing governments in South Korea, under the control of the US, kept a lid on the story. But then in 1999 the Associated Press broke the story and the BBC followed with a documentary (entitled "Kill 'em All") a few years later. This film reveals orders coming from the highest levels of the Army instructing the field commanders to kill all civilians who got in the way.

많은 세월 동안 노근리 학살은 미국의 통제하에 계승된 남한 우익 정부들이 그 이야기를 덮는 것을 고수해왔기에 미국 군대의 비밀로 남아 있었읍니다. 그러나 1999년 연합 통신이 그 이야기를 폭로하고 BBC가 몇 년 후 그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읍니다. (‘모두 죽여라’하는 제목으로요.) 이 필름은 그 명령이 군대 최고위급들에게서 온 것으로 그들이 현장 사령관들에게 갈 길에 방해되는 모든 시민들을 죽이라고 했던 것을 밝힙니다.

Over the years the survivors and their supporters had been trying to bring justice to those who were killed or wounded at No Gun-ri. They organized the "Committee for Unveiling Truth about the No Gun-ri Massacre" and finally helped force the creation of a joint South Korea-US investigation. (The US for a long time tried to down play the size of the killing field.) The final reported conservatively acknowledged the deaths of 228 people and the tunnel where people hid was surveyed and all bullet damage was marked to show the places where US troops had fired-on the tunnel. At both ends of the tunnel there are now triangles (showing where bullets still remain embedded in the concrete) and circles (where bullets created marks).

많은 세월, 그 생존자들과 지지자들은 노근리에서 학살되거나 부상입은 사람들에게 정의를 찾아 주려 노력했읍니다. 그들은 노
리 학살 진상 규명 위원회”를 조직했고 남한-미국 공동 조사단을 꾸리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일조했읍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그 학살의 규모를 애써 축소하려 했읍니다.) 최종 보고는 보수적이나마 228명의 죽음을 인정했고 사람들이 숨었던 터널은 조사되었으며 총탄 흔적들은 미군 부대가 터널 안으로 소총 사격을 했던 장소들을 보이기 위해 표시되었읍니다. 현재 터널의 양 끝에는 삼각형들 (총알들이 아직도 콘크리트에 박혀 있는 곳을 보임)과 원들(총알들이 흔적을 남긴 곳)이 표시되어 있읍니다.

I asked Yang how she felt today about the US military. She said she could never go to school because of her missing eye. Today she grows grapes and persimmons in the small farming village where she lives. "War should not be," she told me.

저는 양할머니께 현재 미국 군대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 말했읍니다. 그 분은 잃어버린 눈때문에 전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말했읍니다. 현재 그 분은 사시는 곳 작은 농촌 마을에서 포도와 감을 재배합니다. “전쟁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저에게 맣씀하셨읍니다.

To this day there has been no financial compensation to the victims or their families. About 50 survivors of the No Gun-ri massacre are still alive.

오늘날까지도 희생자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에게 재정적 보상이라곤 전혀 없었읍니다.약 50 여명의 노근리 학살 생존자들이 아직 살아 있읍니다.

Chung Koo Do is the Director of the No Gun-Ri Institute for Peace Studies and is dedicated to ensuring that the memory of the massacre is not lost and that justice prevails. His mother was a survivor of the slaughter by the 7th Cavalry. He told me that there were over 500 incidents of killing of civilians during the war but No Gun-ri was the only case investigated by a joint South Korean-US government team. After the No Gun-ri investigation the US said it would not look into any other case.

정구도님은 노근리 평화 연구소의 소장으로 학살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고 정의가 승리하기 의해 헌신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제 7 기병대의 학살 생존자였읍니다. 그는 저에게 전쟁동안 500 여개가 넘는 민간 학살 사건이 있었지만 노근리가 남한-미국 정부에 의해 유일하게 조사된 경우라 말했읍니다. 노
리 조사후 미국은 다른 사건들을 찾아 보지 않겠다 말했읍니다.

2010 will be the 60th anniversary of No Gun-Ri. Chung told me his organization is planning to sponsor several important events to commemorate the massacre. He hopes that US soldiers who were involved in the Korean War will come for the events and he particularly hopes that Veterans for Peace in the US will send a delegation to Korea during this time. He asked me to help them make that possible and I told him I would do my best.

2010년은 노군리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선생님은 저에게 그의 조직이 그 학살을 기념하기 의한 몇몇 중요한 행사들을 주최하러 준비하고 있다 말했읍니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미국 군인들이 행사들에 오고 특히 미국의 평화 재향 군인들이 그 기간에 한국에 대표단을 보내길 원합니다. 그는 저에게 그 일이 가능하도록 도와 줄 것을 부탁했고 저는 그에게 제 최선을 다하겠다 말했읍니다.

Chung pointed out with great pride the large area surrounding the No Gun-ri massacre site that will become a peace park. The South Korean government is now building a peace museum, educational facilities, and memorials. The survivors, and their descendants, are determined to keep the memory of No Gun-ri in the forefront of international peace movement efforts.

정선생님은 노근리 학살 현장을 에워싼 큰 지역이 평화 공원이 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가르켰읍니다. 남한 정부는 현재 평화 박물관, 교육 시설들, 그리고 기념관들을 짓고 있읍니다. 생존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국제 평화 운동 노력의 앞장에서 노근리의 기억을 지켜나가기 위해 굳은 결의에 있읍니다.

It is a sad moment in history that should be remembered by all of us.

그 것은 우리 모두에 의해 기억되어야 할 역사의 슬픈 순간입니다.


* 역주 노트 (Translator's note):
No Gun-Ri Institute for Peace Studies, 노근리 평화 연구소 는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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